1. 작품의 줄거리
자신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부르는 작품 속의 화자는 작가인 멜빌 자신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로 추방되어 황야를 떠도는 방랑자의 이름이다.
그는 성경 속의 젊은 이스마엘과 마찬가지로 육지 생활에 큰 불만을 품고 포경선(捕鯨船)을 타게 된다. 그리고 여관에서 식인종의 나라 왕자 야만인 퀴퀘그와 함께 한방에서 자게 되는데, 문신을 한 이 괴기한 인물에게서 그는 기독교도에게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던 진정한 인간애를 느끼게 된다. 그들은 포경선 피퀘드 호에 함께 승선하여 크리스마스 날 운명적인 항해에 나서는데, 배에 오리기 전에 광인인 일라이저로부터 파멸적인 운명에 대해 경고를 받게 된다.
선장인 에이헤브는 "모비 딕"이라고 일컬어지는 머리가 흰 거대한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 있으며, 그러한 증오심에서 승무원들을 마구 다그친다. 선장은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한 항해 목적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선장은 옛 스페인 금화를 마스트에 박고는 제일 먼저 백경을 발견한 사람에게 상으로 주겠다고 말한다. 에이헤브는 무리한 항해를 말리는 1등 항해사이자 독실한 기독교도인 스테벅의 충고도 뿌리친 채 백경(白鯨)을 쫓아 대서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또 태평양으로 항해를 계속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백경의 모습을 발견한다.
장장 사흘 동안 밤낮으로 고래와 사투를 벌인 끝에 선장이 쏜 작살은 명중했지만 고래는 결국 에이헤브를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리고, 피퀘드 호도 침몰한다. 그러나 미리 죽음을 예견한 동료가 만들었던 관을 타고 가까스로 혼자 살아남은 이스마엘이 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2. 작품 연구
(1) 평범한 상상을 거부한 새로운 세계
<모비 딕>은 근대소설의 범주에 들어가기가 힘든 특이한 작품이다. <신곡>이라든가 <까라마조프의 형제>라든가 하는 영원한 인류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서 그 근원성을 보여주고 있다. 흰 고래라는 실지 있는 고래가 아니라 상상의 동물로서 감히 인간이 접근하기 힘든 엄청난 자연의 힘을 상징하고 있다. 처음 이 작품이 나왔을 때 미친 사람의 작품이라 하여 독자들이 기피하자 작가는 의욕을 잃고 작가생활을 중지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흰고래 자체보다는 흰고래에 대결하는 에이헤브 선장의 의지력이다. 그는 무슨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파멸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가 그러한 투쟁의 자세를 보인 것은 한쪽 다리를 빼앗긴 원한 때문이지만 그의 행위는 그 원한만으로 설명될 성질 이상의 것이다. 그는 개인적인 원한을 하나의 계기로 하여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절대성에 대한 도전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절대성이란 인류가 오랜 옛적부터 오늘 현재까지 추구해 온 것, 추구하기 위해서 치러 온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에이헤브 선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놈은 나를 뿌리치고 나에게 마구 덤벼들고 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악한 결심을 품고 사나운 힘으로 공격해 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는 밉다. 흰 고래가 그 사악한 자의 사신(使臣)이든, 그 장본인이든 어쨌든 나는 그 놈을 죽여 없애서 원한을 풀 작정이다."
다시 말하면 에이헤브 선장도 딱히 흰 고래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고 무조건 밉다는 것이다.
(2) 이 작품은 19세기 중엽에 있어 미국의 주요 산업이었던 포경업에 관한 이야기를 공상과 리얼리즘을 섞어 서술한 것인데, 화자인 이스마엘의 관점에서 선장 에이헤브는 복수로 인해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작품을 쓰는 데 있어 자신의 직접 체험뿐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연구를 행함으로써, 보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묘사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3. 주인공에 대한 인상
이 작품의 셰익스피어적 특질 중 하나는 그것이 극적(劇的)인 애매함을 갖는다는 데 있으며, 따라서 각양각색의 해석이 허용된다고 하겠다. 백경(白鯨)을 원시적인 자연의 힘, 또는 인간의 운명의 힘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여 주인공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장 에이헤브를 주인공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막연한 악이나 인류의 환난에 대해 용감하게 도전하는 인간 정신을 표출시킨 작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작품 안에서 멜빌이 가졌던 이 세계에 대한 반역정신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후 비평가들은 멜빌 안에서 위대한 시인의 상상력을 발견했으며, 작품 안에 그 시인이 창조해 놓은 신화(神話)를 보게 된다. 그 결과 비평의 중점은 이스마엘에게 옮겨가게 된다. 에이헤브는 여전히 프로메테우스적, 사탄적, 그리고 파우스트적인 신화 속에 존재하지만, 바다 밑에서 구원받은 화자 이스마엘은 멜빌의 인생관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4. 작품에 나타난 상징성
(1) 흰 고래의 상징
<백경>은 한 마리 거대한 흰 고래를 쫓아 5대양을 누비고 장쾌한 해양 소설이자,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그리고 있는 스케일이 웅장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초판은 1851년 10월 런던에서 <고래>라는 책명으로 먼저 나왔고, 한 달 후 뉴욕에서 <모비딕>으로 개제(改題)하여 미국판이 출판되었다. 이미 말했듯이 멜빌이 심혈을 다해 써서 출판한 야심작이었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기존 소설의 정형을 너무 무시한 당돌함 때문에 호돈 같은 친구 소설가도 당황할 지경이었다. 완전히 묻혀져 버린 <백경>을 사람들이 다시 찾아 읽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레이몬드 위버라는 한 탁월한 학자의 안목 때문이었다. 멜빌이 죽은 지 30년이 지난 1921년에 위버가 정열을 다해 쓴 평론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갑자기 <백경>은 하늘 꼭대기로 들어올려진 듯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멜빌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난 듯 영국이나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널리 알려졌고, 단테나 셰익스피어, 밀턴이나 도스토예프스키와 비교해서 그의 위대성을 논하는 평문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멜빌의 위대성은 당시의 사람들보다 100년을 앞서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2) <백경>의 서술 형식은 분방하며 변환하기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1인칭 서술인가 하면 어느 틈에 3인칭으로 돌변해 있고, 지극히 수필적인 산문이 계속되는가 하면 아주 간단한 장이 나오기도 해서 독자들을 계속 어리둥절하게 한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 소설을 그 당시의 독자들이 통일성이 결여된 형편없는 소설로 치부한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좀더 인내심을 가지고 이 소설에 접근해 보면 그 모든 이질적인 서술 형태와 구조들이 묘하게도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독특한 개성으로 드러난다. 그만큼 <백경>은 아주 특이하고 심오한 작품인 것이다. 그것은 난해하고 무질서한 문학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적으로 독자에게 강한 호소력을 지닌 작품인 것이다.
우선 이 작품의 이해를 위해 그 시대의 미국이란 나라의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미국은 신생 독립국이었고, 난숙(爛熟)한 근대 문명의 고장은 아니었다. 거칠고 굳센 개척자의 생활이 기반이 되어 힘차게 뻗어가는 나라였다. 그런 한편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이른바 청교도적인 엄격한 종교 정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잔뜩 죄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자유, 민주 정신과 격렬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식인과 작가들은 대부분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신성과 수성, 선과 악이라는 갈등과 모순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초월적 이상주의로 치닫고, 어떤 사람은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지고, 어떤 사람은 전원 속으로 도피하고, 어떤 사람은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뉴잉글랜드의 작가 에머슨, 호돈, 롱펠로, 로얼 등이 나왔고, 뉴욕에서는 멜빌과 휘트먼이, 남쪽에서는 포가 나왔던 것이다. 제각기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무언가 공통적인 흐름이 있었다. D.H. 로렌스는 <미국 고전 문학 연구>에서 그들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란히 놓고 '세계가 그들을 두려워 했다. 지금도 두려워하고 있다.' 고 표현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멜빌이 그러한 표현에 해당되는 작가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3) 멜빌이 포경(捕鯨)을 소재로 한 작품을 쓰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산과 바다에 끼여 있는 뉴잉글랜드는 결코 기름진 땅이 아니었다. 따라서 개척과 모험심이 충만한 주민들은 대륙의 중부나 서부도 돌진하고, 한편으로는 대서양으로 밀고 나갔다. 포경은 당시 큰 사업이었으며, 그들은 세계 제일의 포경업자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포경선 선원이기도 했던 멜빌은 자신의 체험을 기초로 고래와 포경에 대한 수많은 기록과 문헌을 수집한 후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게 제일의 포경 대국 미국을 바탕에 깔지 않고는 거대한 고래를 주역으로 등장시킨 그런 힘차고 특이한 상상력은 창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을 생각할 때 <백경>을 분명히 사상적, 상징적 또는 신비적인 작품이면서도 하나의 해양 모험 소설로 받아들여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에이헤브 선장과 백경과의 오랜 투쟁이나 이슈메일과 추장 퀴퀘그의 우정과 모험 등은 독자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보다 고급 독자라면 이런 모험담의 깊숙한 이면(裏面)에서 하나의 위대한 서사시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당시의 미국 개척, 모험 정신은 이 <백경>을 통해 지구의 거의 모든 지역을 덮은 여러 대양을 향해서 나아가고, 미국인을 중심으로 하는 지구상의 수많은 민족들이 무서운 고래를 쫓아서 결투를 벌이는 것이며, 그것이 끝없는 해양의 장관을 무대로 웅대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것을 산문으로 된 대서사시라고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4) 이 비극적인 서사시를 줄거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3부 구성으로 나눌 수 있고, 지리적인 입장에서 보면 4부 구성으로, 희곡의 형식에 비추면 5막으로 분할할 수 있다. 줄거리 중심의 제1부는 이슈마엘의 갖가지 사건과 환경, 그리고 이 항해(航海)가 보통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의 서론 부분이다. 제2부는 백경을 추적하여 대서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태평양으로 방황하는 동안의 갖가지 비극적 해상 생활과 고래에 대한 고증, 고래의 상태와 용도 등 온갖 사상을 치밀하게 기술한 부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적, 결투 패배, 피쿼드호의 침몰에 이르는 것이 마지막 3부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다시 지리적 입장에서 보면 첫째 부분은 이슈마엘과 퀴퀘그를 중심으로 한 향해 준비 부분, 둘째 부분은 피퀴드호가 대서양을 항해하고 있을 때의 에이헤브 선장과 선원들에 관한 이야기 부분, 셋째 부분은 인도양에 피퀴드호가 웅대한 모습을 나타냈을 때의 고래에 대한 서술 부분, 마지막 부분은 태평양에 등장한 피퀴드호가 백경과의 사투를 전개하기까지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희곡적 5막의 처리는 충분히 독자 여러분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5) 이제 이 작품을 어째서 한 편의 대서사시로 비유하는 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이 작품에는 우선 해양과 하늘과 별, 그리고 죽음과 운명과 악에 관한 암울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명상이 흐르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밝고 활달한 유머가 터져 나온다. 그것은 때로 사회와 인생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어느 틈엔가 바뀌기도 하나 때로는 깊은 절망의 소리로 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환상의 안개 속을 방황하는가 하면 이윽고 현실의 장엄한 민주주의의 외침이 일어나기도 한다. 프론티어(fronteer) 정신의 미국적 서사시로서 손색이 없는 장엄한 스케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구성의 다면성이나 서사시적 스케일에만 문학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 그런 것 뒤에 은밀히 감추어져 있는 사상성, 상징성, 신비성을 우리는 마지막으로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사상성과 상징성을 논의한다는 것은 흡사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만큼이나 독단적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철학적으로, 어떤 사람은 사회학적으로, 또 어떤 사람은 정신분석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접근하려고 하고 있어 갖가지 각도에서 해석이 내려지고 있다. 그것들은 각각 어느 한편으로 진실을 포착하고 있기는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각기 억지로 말을 끌어다 붙여 조리에 맞추려고 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징이란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경우에는 진정한 상징이 아니기 때문이다.
번민의 극에서 넓은 세계를 찾아 나서는 이슈마엘과 야만인 퀴퀘그와의 결합은 이 작품에서 지극히 따뜻한 인간적인 결합을 부여하면서 바다는 '신비로운 대양은 인류와 자연계에 가득한 창창하게 바닥도 없이 깊은 영혼의 모습이다.' 라고 말하는 이슈마엘의 방랑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목사 매플의 설교는 이 작품을 꿰뚫는 적극적 사상의 척추를 이루고 있지만 마지막에 그가 매달려 살아나게 되는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음과 소생의 관념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리고 편집광적(偏執狂的)인 의지의 인간 에이헤브와 이성의 인간 스타벅의 대립, 세 키잡이와 세 작살잡이, 또 악마적인 배화교도(拜火敎徒, 조로아스터교) 페들러 등도 그 극적인 박력 외에 선과 악, 문명과 야만성, 싸움과 평화 등으로 우리의 생각을 달리게 하지만 그 정확한 상징의 의미는 명료하지 않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보다도 핵심적인 문제의 초점은 에이헤브와 백경(白鯨)과의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고 그 백경이 무엇을 표상하는가 하는 점에 있다. 맨 먼저 에이헤브로 상징되는 청교도적 투지와 선이, 흉포하기 이를 데 없는 악의 권화(權化)로서의 백경을 추격해서 죽이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그와 정반대로, 인간의 광기가 신적인 것에 도전해서 패배하고 만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인간이 진리를 찾아 무한한 고난을 거듭하면서 파멸에까지도 돌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D.H. 로렌스처럼 백색 인종의 정신이 그 혈기의 본능과 격투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백경을 쇼펜하워적인 우주 내재의 맹목적 의지를 나타낸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상의 모든 견해들은 서로 얼마만큼씩 상징의 본질에 접근하겠지만 또한 모두 빗나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멜빌 자신의 내면에서 상극되어 있던 영혼과 혈기, 문명과 야만성, 선과 악, 현실성과 영원성, 사랑과 증오 등이 서로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얽혀서 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멜빌 자신의 정신적 도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극히 자명한 사실로 귀착되는 셈이다. 그의 그러한 내면 정신이 종합 정리되지 않은 채 산재해 있는 것이다.
<백경>을 읽을 때마다 항시 새로운 그 무엇을 느끼게 되는 비밀은 어쩌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무튼 <백경>은 참으로 고래 같은 거대한 작품임이 분명하다.
4. 작가의 생애
(1) 하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 ∼ 1891)은 1819년 스코틀랜드 계의 유복한 수입업자의 아들로서 뉴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부족함이 없이 생활했으나, 중간에 아버지의 파산과 죽음으로 커다란 시련을 맞게 된다. 학교도 그만두고 상점의 점원, 농장일, 학교 교사 등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20살 때 상선의 선원이 되며, 22살 때는 포경선을 타고 남태평양을 항해한다. 그러다가 46년 포경선에서 탈주, 남태평양의 마케이자스 군도의 한 섬에서 동료 한 사람과 함께 식인종의 포로가 된 적이 있는데, 그들은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멜빌은 이때의 체험을 모아 <타이피 족>을 발표했다. 그후 계속해서 남태평양의 여유로운 방랑생활을 그린 <오무>와 가공의 모험담인 <마디> 등을 내놓았다.
엘리자베스 쇼라는 여성과 결혼한 그는 뉴욕으로 이주한 다음 그곳에서 유력한 문학 서클을 알게 된다. 그 인연으로 리버풀을 왕복하는 상선 생활을 담은 <레드 번>을 출판했으며, 49년에는 <하얀 재킷>의 원고를 들고 런던으로 향한다. 이듬해 피츠필드 근처에 농장을 사서 그곳에 '화살촉'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 그 집에서 <백경>을 썼다.
1851년 작품이 출판되었지만 평은 그리 좋지 않았으며,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만이 그의 작품을 인정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이듬해에도 <피에르>라는 작품을 출판했다. 그후 10년간 <사기꾼>, <서기 버틀비> 등 계속적인 작품활동을 하면서 유럽 성지 여행을 가기도 했는데, 그때 리버풀에서 영사로 있던 호손과 만나게 된다. 1850년 그는 매사츄세츠 주의 리녹스에서 나타니엘 호돈과 바로 이웃에 살면서 깊이 사귀었다. 호돈의 <주홍글씨>가 나온 뒤 꼭 1년만에 그는 장편 <백경>을 써 그에게 바치고 있다. 귀국 후에는 각지를 돌며 강연 여행도 했다.
1860년, 뉴욕으로 돌아와 20년 동안 세관에서 일했으며, 그 사이 그의 이름은 서서히 잊혀져 갔지만 간간이 시집 등을 발표했다. 미발표 원고에는 2권의 여행기와 명작 <빌리 버드>가 남겨져 있었다. 1891년 73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감한다. 1919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내놓은 R.M. 위버 교수의 <하먼 멜빌>에 의해 명성이 부활되었으며, 금세기에 들어서는 미국 문학 최고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이 작품이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멜빌이 죽은 뒤 약 30년이 지난 뒤부터이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 작품은 아직도 수수께끼의 작품으로 남아 있다. 이 소설에는 엄청나게 과장된 유모어가 자리잡고 있어 해석하기가 무척 힘든 면이 있다. 그 유모어는 일종의 상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해석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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