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9일 월요일

백경 (Moby Dick,1956)



과연 이 사람이 그 사람 맞나? "로마의 휴일"에선 달콤한 로맨스 가이로 나온 사람이 같은 해 나온 이 영화에선 광기에 사로잡힌 늙은 외다리 선장으로 나와 전혀 다른 연기를 보여 줍니다. 그레고리 펙의 넓은 연기 폭을 보여주는 존 휴스턴 감독의 "백경"은 허먼 멜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는 많습니다만 1956년작이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원작의 분위기를 가장 잘 살렸을 뿐 아니라 보기 드물게 그레고리 펙의 음울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어서 많은 영화팬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좋습니다. 이슈마엘 역의 리챠드 베이스하트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걸작 "길"에서 젤소미나에게 트럼펫을 가르쳐주던 광대역을 했던 사람입니다. 영화 속 화자이면서 튀지 않는 연기로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의 강렬함을 잘 떠받치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 교회에서 강렬한 인상으로 설교하는 성직자 역은 "시민 케인"의 감독이자 배우 오손 웰스가 맡았습니다. 짧게 잠깐 나오지만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와 목소리로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잡아주는 멋진 연기를 보여주죠. 그 밖의 조연들도 원작의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역을 주로 했던 그레고리 펙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자연에 대한 복수심으로 광기에 사로잡힌 에이허브 선장 역할은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생각 외로 잘 소화했습니다. 모든 선원들을 죽음으로 끌고 들어가는 음울하고 강렬한 카리스마가 스크린에 모비딕의 피처럼 뚝뚝 묻어납니다. 지금은 에이허브 선장 역에 그레고리 펙 말고 다른 배우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만 뛰어 난 것도 아닙니다. 영화는 1956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실감나는 화면도 만들어 냈습니다. CG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그렇게 실감나게 만들었는지 감탄이 절로 납니다. 고래잡이 배와 선원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는 오히려 요즘 기술로 재현하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영화는 해양모험 그 자체로 충분히 흥미롭지만 신과 인간, 선과 악, 자연과 인간, 숙명과 자유의지 등 매우 철학적인 질문들을 떠올릴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각자 느끼는 만큼 풍부한 이야기로 다가오는 걸작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네요.

에식스 호의 비극과 『백경』 : 실제와 허구의 틈 메우기

『백경』은 멜빌이 자신의 고래잡이 승선체험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허구로 꾸며낸 이야기일까? 『백경』을 꼼꼼하게 읽은 독자라면 멜빌이 이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멜빌은 『백경』 제45장에서 1807년 낸터킷 선적 유니언(Union) 호의 난파사건, 1820년 낸터킷 선적의 에식스(Essex) 호의 난파 사건, 1830년 경 미국 전함의 고래 충돌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유니온 호의 난파 사건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고, 미국 전함은 말향고래와 세게 부딪혀 침수되었으나 가까스로 항구로 입항하여 수리를 마쳐서 『백경』의 소재로 쓰기에는 다소 미약했다. 결국 멜빌은 "요즈음도 폴라드 선장이 낸터킷에서 살고 있고, 조난당한 에식스 호의 1항사였던 오언 체이스(Owen Chase)도 만난 일도 있고 그의 진솔한 기록도 읽은 적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소설 『백경』과 그 소재인 에식스 호 난파 사건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에식스 호의 난파 사고에 대한 자료로는 생존자들의 진술과 몇몇 연구자들의 연구서가 있다. 사건 직후인 1821년 1항사였던 오언 체이스의 회고담이 『고래잡이 배 에식스 호』(The Whaleship Essex)라는 제하로 출판되었고, 1832년에 폴라드(George Pollard) 선장의 회고록이, 그리고 채플(Thomas Chapple)의 진술이 출판되었다. 폴라드 선장과 채플의 진술서는 말 그대로 소략한 진술서에 불과하다. 그밖에 에식스호의 소년 급사로 승선했던 니커슨도 회고록을 남겼으나, 사건 발생한 지 50여년 뒤에 작성된 데다 1984년 낸터킷 역사학회에서 학술연구용 한정 부수를 출판하여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밖에 에식스 호 관련 저술로는 토머스 헤퍼넌의 『고래한데 박살이 났다: 오웬 체이스와 에식스 호 이야기』(1981)와 헨리 카라일의 소설 『요나 맨』, 해양사학자인 필브릭의 『바다 한 가운데서 : 고래잡이 배 에식스 호의 비극』이 있다. 이 가운데 필브릭의 저서는 관련자들의 회고록과 최근까지의 연구서를 종합하여 에식스 호 난파사건을 재구성해 내었다. 그같은 성과를 인정받아 『바다 한 가운데서』는 타임즈(Times)가 선정한 2000년 논픽션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고, 미국도서상(National Book Awards)도 받았다. 따라서 에식스 호의 난파 사건에 대해서는 필브릭이 재구성한 이야기가 현재까지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건해양연구소(Egan Institute of Maritime Studies)의 소장이자, 요트맨이자, 전문 해양사학자인 필브릭은 "에식스 호 사건은 멜빌의 <백경>의 마지막 부분에 영감을 준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제공했다"고 밝히면서, 고래의 생태학, 인간의 본성,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육체적, 심리적인 갈등과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 등을 치밀하게 재구성해 내고 있다.

필브릭의 『바다 한 가운데서』는 태평양으로 고래잡이를 나선 낸터킷의 고래잡이 배 에식스 호가 고래에게 들이 받쳐 난파한 이후 보트에 나누어 탄 선원들이 바다에서 겪은 처참한 생존기록이다. 1819년 8월 에식스 호는 조지 폴라드 선장의 지휘아래 총 22명이 승선하여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고래잡이를 나선 238톤급 고래잡이 배였다. 1819년 8월 12일 낸터킷을 출항한 에식스 호는 대서양의 케이프 베르데 제도를 거쳐 아르헨티나 남단의 케이프 혼을 돌아 1820년 봄에는 페루 앞바다에서 고래를 잡기 시작하여 1820년 11월 중순에는 태평양상의 서경 120도, 0도 선상에서 고래를 쫓고 있었다. 1820년 11월 20일 고래를 쫓던 에식스 호는 분격한 향유고래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만다.

모선을 잃은 선원들은 작은 보트 세 척에 나누어 탔고, 각 보트는 조지 폴라드 선장, 체이스 1항사, 조이 2항사가 각각 지휘하였다. 가장 가까운 육지는 서쪽으로 3200km나 떨어진 폴리네시아의 마키저스 제도였다. 그러나 그곳까지 가기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는 다른 고래잡이 배를 만나기를 기대하고 적도 북쪽으로 항해하기로 하였다. 보트 3 척에는 건빵 90kg과 식수 245리터뿐이었다. 그러나 곧 식량이 바닥이 나자, 바다거북을 사냥하여 일부 식량을 조달하기도 하였으나, 그것마저도 동이 나고, 선원들은 기력을 잃어 갔다. 게다가 폭풍이 몰아닥쳤고, 폭풍이 자고 나자 이번에는 적도 무풍대에 들어서서 보트는 꼼짝달싹 하지 않았다. 결국 노를 저어 무풍대를 벗어났으나, 식량이 떨어진 데다 무리하게 힘을 쏟아 부은 바람에 탈진하였다. 다행히 3 척은 태평양의 핸더슨 섬에 표착하였다. 그러나 핸더슨 섬은 식수원이 없었다. 결국 이 섬에 남기를 원하는 선원 3명을 남겨 놓고 다시 육지를 찾아 나섰다.

태평양을 표류하는 동안 두 번째 보트를 지휘했던 조이 2항사가 사망하여 이제 보트는 폴라드 선장, 체이스 1항사, 헨드릭스 키잡이가 지휘하게 되었다. 1820년 1월 14일에 헨드릭스가 지휘하는 보트에서 식량이 바닥나자 폴라드 선장은 식량을 일부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내 바닥이 났고, 헨드릭스 보트에 타고 있던 흑인 토머스가 죽었다. 헨드릭스의 보트에는 이제 450g 밖에 식량이 남아 있지 않았다. 토머스의 시체를 수장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토론 끝에 토머스의 시체를 먹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1월 23일 헨드릭스의 보트에 타고 있던 흑인 찰스 쇼터가 죽자, 토머스와 똑같은 운명에 처했다. 폴라드의 보트와 체이스의 보트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상황은 극한으로 가서 이제는 사람을 식용으로 쓰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처하였다. 열 여섯 살의 램스델이 제비뽑기로 죽을 사람을 정하자고 제안하였으나, 모두 주저하고 있을 때 이 제안을 적극적으로 찬성한 코핀이 제비를 뽑아 선원들의 식량이 되었다. 1820년 1월 29일 핸드릭스가 지휘하는 보트가 폴라드와 체이스가 지휘하는 보트에서 이탈했다.

에식스 호가 침몰한 지 89일째에 체이스 1항사가 이끄는 보트는 칠레 연안의 마사푸에라 섬 인근에서 인디언 호에게 구조되었다. 구조된 사람은 체이스 1항사와 키잡이 로렌스, 급사 니커슨 세 명뿐이었다. 체이스 일행은 4000km를 항해해 왔던 것이다. 체이스 1항사가 인디언 호에 구조될 당시 남쪽 480km 해상에서 칠레를 향해 표류하고 있었던 폴라드 선장의 보트도 1821년 2월 23일 칠레의 상 마리(St. Mary) 섬에 도착하였다. 당시 폴라드의 보트에는 폴라드 자신과 램스델 만이 생존해 있었다. 핸더슨 섬에 남았던 세스 위크스와 윌리엄 라이트, 토머스 채플은 1820년 4월 9일 서리(Surry) 호에 구조되어 모두 생존하였다. 헨드릭스의 보트에 탄 선원의 행방이 묘연했다. 1825년 영국 해군의 프레데릭 윌리엄 비치 대령은 핸더슨 섬 동쪽 두시(Ducie) 섬에서 보트 한 척과 유골 네 구를 발견했다. 비치 대령은 이것이 에식스 호의 3번 보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에식스 호 난파기와 멜빌의 『백경』을 비교해 보면, 백경은 에식스 호 난파기의 앞 이야기에 해당한다. 멜빌이 자필 수고에서 쓴 것처럼, 그는 1841년 아쿠쉬네트(Acushnet) 호에 승선하고 있을 때 선원들로부터 에식스 호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당시 아쿠쉬네트에 타고 있던 체이스의 아들로부터 오원 체이스의 회고록을 빌려 읽은 적도 있었다. 멜빌은 에식스 호 난파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음에 틀림없고, 1846년 처녀작 『타이피』를 발표하여 창작생활에 전업하면서 에식스 호 난파담은 그에게 훌륭한 이야기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멜빌이 만약 에식스 호의 난파 이후의 이야기를 소설화했다면, 이는 실패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널리 알려진 에식스 호의 이야기라는 것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금새 간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염두에 두어야 했던 멜빌은 소설 『백경』을 백경을 쫓는 에이햅 선장의 집념과 난파하기까지의 과정을 고래에 대한 박물지와 함께 곁들여 형상화시킴으로써 에식스 호 난파기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창조하였다. 그로써 출간 당시에는 "등장인물들이 중간에 아무 설명도 없이 사라지거나 서술체의 시점이 자주 바뀌는 등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지치게 만들어 빛을 보지 못했지만, 어느 분야에도 속하지 않는 작품으로서 최고의 소설 문학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대륙 문학의 아류로서 영국 문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미국 문학은 멜빌에 의해 비로소 새로운 형식을 확립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백경"을 읽고 (Moby Dick 독후감)

"백경"을 읽고 (Moby Dick 독후감)
                                                                      김영준*72

이 책은 1851년에 영국에서 출간되었다.(그때만 해도 영국이 출판, 출간의 중심이었다고 함)
출간 당시에는 별 주의를 받지 못하다가 1920년대 가 되어서야 서서히 인정 받다가 나중에는 영문학계의 가장 위대한 소설의 하나로 인정 받는다.
멜빌은 1819년에 뉴욕에서 태어나서 1891년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젊어서 그는 포경선 선원 생활을 한 바 있다.
사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대한 것은 아마도 10대 초반이었든 것으로 생각된다. 소설을 읽은 것이 아니고 그레고리 팩이 주연한 영화“백경”을 본 것이었다. 아마도 형들을 따라 본 것이기는 했지만 흰고래와의 사투가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후 간간히 Moby Dick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뭔가 미해결의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고는 이 위대하다는 소설을(미국에서 정신과 레지던트를 할 때, 나의 슈퍼바이저를 하던 분이 학부에서 영문학을 한 분이었는데, 이 소설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도 심오한 소설이라고 꼭 읽어보라고 한 원인도 있지만)
읽기로 하여 30 여년전 시작했는데--- 드디어 진갑이 지난 나이에 끝내게 되었다. 새로 시작한지 5개월 만에. 두권의 다른 번역판과 한편의 영문판이 필요 하였다.
이 소설은 대단히 지루하고 난해하다. 지루한 이유는 간단한 스토리 – 괴물스런 흰 고래를 악착 같이 추적하여 싸우다 배가 침몰하고 모두 죽는 이야기에 붙은 곁가지 때문이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화자인 Ishmael은 Ahab 선장이 이끄는 포경선 Pequod호를 타고 거대한 흰 향유고래 Moby Dick을 잡으러 나갔다가 혼자 살아 돌아 오는 이야기이다.
이 곁가지들은 스토리가 아니다. 소위 고래학이라고 하는 것들인데, 더 세분하면, 일반 고래학, 잡은 고래학, 놓진 고래학, 포경의 역사, 법률적 고찰 등등이다. 멜빌은 소설이 시작하기 전에 고래의 어원, 신화적, 종교적, 문헌적, 역사적 고찰과 해설을 수 십 페이지가 넘게 쓰고 있다. 여기서 이 소설의 지루함과 난해성으로 독자들에게 좌절을 준다.이뿐 아니다. 전체 소설의 약 사분의 삼이 소설의 중간 중간에 이 고래학에 대한 것들이다. 아니 고래학 중간중간에 조금씩의 스토리가 나온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큰 바닷고기를 잡는 노인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다 . 여기서도 고기 잡는 것과는 상관 없는 Brooklyn Dodgers의 야구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노인 산디아고가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내면의 자신과 대화하는 것으로 우리는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 들인다. 멜빌의 소설 속의 고래학은 얼핏 추적대상을 연구하는 것이라 생각 해 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스토리의 전개나 진행, 인물들의 내면 에서 일어나는 일들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반적 서술이며, 이 고래학 전부 – 소설의 대부분이 되겠지만- 를 없앤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소설의 진행이나 긴장 등에 오히려 낳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바로 여기에 이 소설의 첫번째 난해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소설의 난해성은 James Joyce 의 Ulyssise 에서의 난해성과 같은 류는 아니다. 어려움은 왜 이 고래학이 이 소설의 이 부분에 있는가 이다. 알다시피 고래학은 난데 없이 스토리의 중간에 나타나 여러 chapter가 계속 되다 얼마 후 또 나타난다. 차라리 모두 한군데 모아 두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것들이 바로 나를 30년이나 걸리게 한 가장 큰 원인이다.그때마다 건너 뛸 것을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 거미와 같은 인내심으로 글자 하나 빼지 않고 읽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죄와 벌, 까라마죠프의 형제들 에서 보는 인간성의 갈등을 읽으며 느끼는 긴장된 희열은 전혀 없다. 무미 건조한 멜빌의 박학다식함을 – 소설의 화자인 이스마엘의 종횡무진한 인맥(수학자, 고고학자, 성서학자, 박물학자, 역사학자, 문필가 등등 끝이 없다)과 인용을 통해 무미건조한 주입식 강의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던 어느 날 –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묻지 말기 바란다- 소설을 반쯤 읽고 있을 때였다.
아직 고래를 잡는 시늉도 하고 있지 않은데—나는 책을 덮고서 생각에 빠져 들었다.작자가 의도하는 바가 뭔가? 멜빌은 고래학강론이 소설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도록 의도 했을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그는 그 나이에 걸릴 수 있는 정신병에 걸려 연결 고리가 느슨한 장광설을 쏟아 내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 확실해 보이는데, 왜 소설의 중간 중간에 고래에 관한 학문적 해설을 이렇게도 길게 쓰고 있을까? 이 소설을 위대하다고 하는 위대한 평론가들은 또 뭔가? 모두 나보다 소설 보는 눈이 못하단 말인가? 이 고래의 정체는 무엇인가? 고래를 쫓는 에이하브 선장은? 문학 아니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나는 점점 더 본질적인 이쓔에 빠지고 있었다. 위대한 예술이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공통분모를 구체적으로 형상화 – 그 것이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간에- 하여 그 구체적 형상을 통하여 공통분모를 재생해 내는 작업이 아닐까. 이 경우, 멜빌의 의식 또는 무의식속에 있던 그 무엇이 이 소설로 구체화되어 있으며 독자인 나를 통하여 나 속의 그 무엇들과 공명하고 있다면 멜빌의 그것과 나의 그것이 완전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들의 그 무엇과 계속 공감을 불어 일으킨 그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래학의 의미는 책 속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 자신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무 스토리가 없는 소설을 상상해보자, 내 스스로 메꿔 나가야 하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서, 이것이 나 자신의 Rorschach Test 가 된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의 바다에서 무수한 유령과 악령과 그리고 고래들을 - Moby Dick을 – 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 멜빌은 우리에게 백경을 써 준 것이 아니라 백지 검사지를 준 것이었다.

이 소설은 이스마엘이 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문학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첫 문장으로 이 소설이 시작된다.
“날 이스마엘이라 불러다오. 몇 해 전—정확히 언제인가는 묻지 말아 주기 바란다—주머니에 돈도 없고------” 로 시작한다. (Call me Ishmael. Some years ago- never mind how long
precisely- ) 이것은 명백한 하나의 선언이다. My name is Ishmael.이 아니다. 날 이스마엘이라 불러 달라고 하는 것은 문맥상, “본명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이 이름을 택한다”는 선언적 의미를 가진다. 이스마엘이란 이름은 무언가? 방랑자, 추방자를 뜻하는 이유는 구약성서에 있지 아니한가? (창세기 26장) 유대교에서 신앙의 조상으로 알려진 인물 아브라함의 서자로, 결국 아버지로부터 추방되어 나중에 지금의 팔레스타인민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는 인물이다. 19세기의 만하탄, 당시에는 유태계 이름 만으로도 싸구려 여관에서 조차도 쫓겨날 때였다면, 아랍계통의 이름으로는? 멜빌은 세상에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이스마엘이 하는 말에서 그는 전직 교사였고, 역사가, 수학자, 박물학자, 문학가, 고고학자, 문헌학자, 신학자, 종교학자 등등 많은 지식인들과 깊은 교류를 자진 인물로 보인다. (물론 멜빌 자신을 말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인물이 어느날 스스로 이스마엘로 불러달라고 한다면? 충격이며, 도발이며, 도전이다.
소설의 도입부에 이스마엘의 입을 통하여 기독교의 배타적 교리를 뒤집어 엎어 우상숭배야 말로 가장 기독교적이라는 논리를 전개하며, 이스마엘과 식인종 출신의 작살꾼 쿼퀘그 사이의 동성애적 관계 등을 통해 멜빌의 도전을 볼 수 있다.
이 책의 제 일장에서
 “이의가 재기된 미국의 대통령 선거전”
 “이슈마엘의 포경선 항해”
 “피 비린내 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 세가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공고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가운데 것만 빼면 1850년의 미국과 2006년의 미국이 이렇게 같을 수가! 1840년 말의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Martin van Buren 당시 현직 대통령은 더 많은 표를 얻고도 선거인단 수에서의 열세로 Walliam Henry Harrison에게 패한다. 선거전에서 기력이 쇠진한 헤리슨은 1841년 1월 취임식에서 폐렴에 걸려 한달 뒤 사망하였다. 우리는 조지 부쉬와 알 고어 사이의 너무나 비슷한 대통령 선거전을 기억하고 있다. 또한 5년여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1842년 영국이 아프카니스탄에서 철수한 것을 멜빌이 말하고 있다. 멜빌의 두 사건은 부쉬가 대통령이 되어 아프간 전쟁을 시작한 것과 나란히 진행되고 있다.
백경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인데, 이 고래를 악의 화신으로 보는 견해와, 그 정 반대 즉 에이허브(Ahab)선장이야 말로 그냥 내버려 두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이 흰 고래와의 일방적 원한에 사로 잡힌 편집광이며 자신의 병적인 집착으로 인하여 자신과 그의 배(Pequod호) 그리고 모든 승무원을 파멸로 이끄는, 그리하여 인간의 파멸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스마엘의 이름이 주는 의미는 말한 바 있지만 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과 배의 이름은 멜빌이 뜻하는 바에 의해 상징적으로 이름 지워졌다. 여기에 나오는 이름들 : Ishmael, Ahab, Elijah는 성서에 나오는 영어식 이름이고, Starbuck, Stubb, Flask 는 흔하지는 않으나 비교적 영미식 이름, Queequeg, Tashtego, Dagoo, Fedallah 등은 각각 다소 괴상한 식인종, 미국 인디안, 아프리카인, 배화교도의 이름이다. 이스마엘이 묵는 여인숙의 이름은 Spouter Inn , (즉 고래가 뿜는 물보라 여인숙) 이며, 주인의 이름은 Coffin 이다.
선장의 이름 에이허브 는 성서적 상징이다. 구약 열왕기 상 16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왕의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성경에는 “아합“으로 되어 있다). 이 아합이란 왕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사악한 임금으로 나온다. 우상숭배와 탐욕으로 인해 그는 결국 멸망당하여 그 주검을 들개 떼에게 먹히는 하나님의 응징을 받는다. 에이허브도 비슷하다. 자신의 백경에 대한 광적 복수에 집착한 나머지 이를 말리는 일등 항해사 스타박의 만류를 듣지 않는다. 결국 모두를 파멸로 몰아 넣고 마는데, 그들의 배는 Pequod호이다. 미국 원주민으로 지금의 Connecticut 에 살던 Pequot족 인디안의 이름을 딴 것으로, 또한 그들이 18세기에 피쿼트 전투에서 몰살당한 부족이었다는 역사를 안다면 멜빌의 의도도 알 수 있을 것 아닐까? 그 배는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미합중국을 상징한다고도 보는 이도 있다.
멜빌은 미국의,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래서 두 비극적 사건의
사이에 자신의 항해를 끼워 넣은 것은 이스마엘로 하여금 예언자적 위치를 가지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것은 멜빌이 에필로그의 첫 문장을 구약성경의 욥기를 인용하는 데서 보인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께 고하러 왔나이다.” – 욥기 1장
그러면 이 흰 괴물스런 고래, 모비딕은 무었인가?
인간들을 파멸 시키므로 악의 화신으로 생각 할 수 있다. 위에서 인용된 욥기구절은 사탄이
욥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욥의 자식과 재물을 빼앗아 갈 때, 혼자 살아 남은 욥의 신하가 욥
에게 그가 본 것을 고하는 말이다. 이스마엘은 혼자 살아 남아 자신이 본 파멸의 과정을 술회한다. 물론 이때의 약탈자는 고래가 된다. 그러면 에이허브 선장은 역경을 무릅쓰고 악을 파괴하기 위해 싸우는 정의의 사도라 할 것인가? 에이허브의 일등항해사스타박은 에이허브에게 고래는 그냥 고래일 뿐 복수의 대상도 파괴의 대상도 아니라고 여러 번 말한다.
그러나 에이허브에게 이 고래는 그에게서 한쪽 다리만 아니라 모든 것을 가져간 약탈자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철저히 정복하고 사라지게 해야 할 그 무엇이 되어 있다. 그 것은 악일 수도 있고, 우리가 바라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것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파괴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일 수도 있다.
바다란 이 소설에서 무엇인가?
해석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지만 나는 무의식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이 무의식의 바다에 떠다니는 괴물 : 욕망, 수치, 갈등, 나의 모든 정신적complex, 그리고 내가 집착하고 추구하는 모든 것의 화신이 모비딕이다.
소설 자체가 하나의 비유(allegory)가 아닌 여러가지의 비유로 쓰여진 만큼 해석도 다양해야 할 것이다.
이 소설의 난해함에는 우리말 해석의 문제가 있다. 어떤 이는 모든 번역가는 총살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지만 번역판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마치 한국말로 더빙된 외국영화를 보는 것 보다 더 어색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짧은 영어 실력으로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전체를 원문으로 읽을 수는 없고, 에이허브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 다섯章만 원문으로 읽었음을 고백한다. 물론 어렵기로 소문난 이 소설을 원문으로 읽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 고래를 추적하면서부터 에이허브의 말이 길어지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에이허브의 열변은 보통 한 페이지쯤 되고, 한 문장은 보통 30-40단어쯤 된다. 이것들이 ; - ? ! 들로 연결이 되어 최악의 경우 한 페이지가 한 문장이다. 문장은 서술체가 아닌 시적 문장이다. 즉, 우리가 아는 영문법, 주어 동사 등등 의 순서와 위치가 뒤바뀌는 것은 예사고 생략되거나 중첩되기도 한다.
배에서 쓰는 어휘들은 사전만 찾으면 되지만, 古語, 詩語들로 된 문장의 맛을 알기는 마치 레스토랑의 메뉴판에 있는 설명으로 음식맛을 느끼는 것과 같이 어려웠다. 어쨌건, 문장들은 장중하고 거창하며, 고풍스러운 비유와 은유와 미사여구로 가득하다. “오등은 차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 독립선언문이나 구약 성서를 읽는 것 같다고 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표현이 될지 모른다. 하기사 에이허브도 자신을 노아와 비교하고 있으니까. 二음률, 五음률과 같은 음률로(Shakespeare가 이 방면의 대가라 함) 쓰였다고 하나 나는 이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스타박이 에이허브가 마지막 운명의 출격을 명할 때 “Aye, sir, thou wilt have it so.” “ Oh, my captain, my captain – noble heart—go not, go not—“ 하고 만류하는 장면의 영어 정도는 읽을 맛이 제법 있다.
소설의 문체도 일반적 서술도 있고 어떤 장들은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예를 들면 “ ( 앞돛대의 망루, 에이허브가 등장하며 독백) “ 같은 구절이 괄호와 함께 대사 사이에 끼어 들기도 한다. 이때는 어쩔 수 없이 셰익스피어의 연극 장면이 연출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멜빌 자신도 그 선상에 에이허브를 두고 있었든 것으로 추축들 하고 있다. 비극적 결말로 갈 수 밖에는 없는 성격과 인품의 조합, 위대한 영혼과 비뚤어진 성품, 큰 야망과 부도덕 등등, 이런 것들은 전형적 셰익스피어적 비극의 주인공들이 아닌가. 에이허브는 이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자, 이쯤에서 에이허브의 독백을 한번 들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In his infallible wake, though; but follow that wake, that's all. Helm there; steady, as thou goest, and hast been going. What a lovely day again; were it a new-made world, and made for a summer-house to the angels, and this morning the first of its throwing open to them, a fairer day could not dawn upon that world. Here's food for thought, had Ahab time to think; but Ahab never thinks; he only feels, feels, feels; that's tingling enough for mortal man! to think's audacity. God only has that right and privilege. Thinking is, or ought to be, a coolness and a calmness; and our poor hearts throb, and our poor brains beat too much for that. And yet, I've sometimes thought my brain was very calm - frozen calm, this old skull cracks so, like a glass in which the contents turned to ice, and shiver it. And still this hair is growing now; this moment growing, and heat must breed it; but no, it's like that sort of common grass that will grow anywhere, between the earthy clefts of Greenland ice or in Vesuvius lava. How the wild winds blow it; they whip it about me as the torn shreds of split sails lash the tossed ship they cling to. A vile wind that has no doubt blown ere this through prison corridors and cells, and wards of hospitals, and ventilated them, and now comes blowing hither as innocent as fleeces.
Out upon it! - it's tainted. Were I the wind, I'd blow no more on such a wicked, miserable world. I'd crawl somewhere to a cave, and slink there. And yet, 'tis a noble and heroic thing, the wind! who ever conquered it? In every fight it has the last and bitterest blow. Run tilting at it, and you but run through it. Ha! a coward wind that strikes stark naked men, but will not stand to receive a single blow. Even Ahab is a braver thing - a nobler thing that that. Would now the wind but had a body; but all the things that most exasperate and outrage mortal man, all these things are bodiless, but only bodiless as objects, not as agents. There's a most special, a most cunning, oh, a most malicious difference! And yet, I say again, and swear it now, that there's something all glorious and gracious in the wind. These warm Trade Winds, at least, that in the clear heavens blow straight on, in strong and steadfast, vigorous mildness; and veer not from their mark, however the baser currents of the sea may turn and tack, and mightiest Mississippies of the land swift and swerve about, uncertain where to go at last. And by the eternal Poles! these same Trades that so directly blow my good ship on; these Trades, or something like them - something so unchangeable, and full as strong, blow my keeled soul along! To it! Aloft there! What d'ye see?"
책을 끝내자 나는 뭔가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작 할 때의 그 맥 빠지는 느낌은 “와! “ 같은 감탄사로 바뀌었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내 영혼이 엎 그레이드 된 것 같다고나 할까, 뭔가 그 감동이 나 자신의 어떤 본질을 흔들어 놓은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다음 목표는 역시 해양 소설인 Josheph Conrad의 “Lord Jim”이 될 것이다.
죄와 속죄에 관한 소설이다.
독후감도 쓸 것이다.—언제가 될 것인지는 묻지 말아 주기 바란다.

백경 (흰 고래)

‘드럼의 신’ 존 보넘 최고의 레퍼토리는? 존 보넘 없는 레드 제플린은 레드 제플린이 아니다 / 이근형



[인터뷰365 이근형] 흔히들 본조(Bonzo) 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드럼의 신(神) 존 보넘(John Bonham) 은 그의 뒤를 이어서 등장했던 이 세상 모든 드러머들의 아버지이고, 신이다. 물론 이런 대접을 받는 드러머야 크림(Cream) 의 진저 베이커, 그리고 딥 퍼플의 드러머 이언 페이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 시대로 접어들게 되면 머틀리 크루 및 랩 메탈 밴드 메소드 오브 메이헴 등을 거친, 사고뭉치 드러머 타미 리(Tommy Lee) 도 손꼽을 수 있겠다. 다른 장르이지만, 재즈 드럼계의 일인자 아트 블래키는 록 팬들에 의해 “존 보넘의 라이벌” 이라는 때 아닌 비교(?) 를 당하니, 어쨌거나 존 보넘의 네임 밸류가 그만큼 대단하기에 일어나는 해프닝이라고 보면 된다.
최고의 하드 록, 헤비메탈 그룹 레드 제플린은 각자 파트의 1인자들만 모였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 바닥에서 레드 제플린 만한 슈퍼 밴드는 없다는 말을 듣는다. 모든 록 보컬들은 로버트 플랜트처럼 되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했고, 모든 기타리스트들은 ‘영국 3대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를 닮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리고 역시 록계에서 키보드, 베이스 연주에 있어 존 폴 존스만한 인물 찾기도 힘들다고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어떤 드러머도 비교할 수 없는 존 보넘의 가치는 곧 레드 제플린의 존재를 좌우한다. 오죽했으면 존 보넘의 사망 후, 지미 페이지가 “존 보넘 없는 레드 제플린은 레드 제플린이 아니다”라고 못 박아 이야기하였겠는가.
세계 최고의 록밴드 레드 제플린, 그리고 그 밴드에 속해있는 드러머 존 보넘은 이렇게 각종 미사여구를 다 붙여줘야 설명이 가능하다. 평단이라는 집단은 그 아티스트의 못난 점을 지적하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따지기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존 보넘(사실 레드 제플린 모든 멤버가 다 그렇다) 만큼은, 평단에서도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없는 드럼계의 절대적 인물” 이라고 평한다. 어느 언론에서는 존 보넘을 일컬어 “하드 록에서 존 보넘의 아성을 넘볼 드러머는 없다”라고 말했으니, 가히 존 보넘의 실력이 궁금해지기 일쑤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레드 제플린의 그 수많은 명곡들에는 어김없이 존 보넘의 드럼 파트가 들어갔다는 것을. 레드 제플린은 그 4명 멤버가 그대로 끝까지 갔으니, 기수 따질 필요 없이 모든 앨범 세션은 존 보넘이 맡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너무나도 유치한 생각이지만, 레드 제플린의 노래들 중에서 존 보넘의 드러밍이 최고조에 달했었던 곡들을 간추려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레드 제플린 최고의 명곡 리스트, 그리고 레드 제플린이 프로그레시브 록이나 레게 같은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텍스트 등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봐왔다. 그러나 당최 존 보넘의 최고의 레퍼토리에 대해서는 그 텍스트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준비했다. ‘드럼의 신, 존 보넘 최고의 레퍼토리는?’ 이 글의 내용은 레드 제플린의 정규 앨범에서 간추렸으며, 대체적으로 주변의 평가에 의해 존 보넘의 드럼 파트가 도드라진 곡들을 위주로 적은 것을 서두에 미리 밝히는 바다.

1집 Led Zeppelin먼저 레드 제플린 1집 Led Zeppelin부터 알아보겠다. 역시 이 앨범에서 존 보넘의 드럼 연주가 도드라지는 트랙은, 제일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1번 트랙 Good Times Bad Times다. 이 곡이야 이미 레드 제플린의 클래식으로 등극한지 오래고, 레드 제플린 초창기 시절을 대표하는 영광스런 흔적이기도 하다. 근데 이 노래의 드러밍은, 특히나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존 보넘 최고의 레퍼토리를 말해준다. 인트로부터 풀고 조이기를 반복하며 환상적인 조율 능력을 보여준다. 드러머의 기본 자세는 역시 리듬을 맞추고, 세션이 옳은 길로 가기 위해 도와주는 ‘조율 능력’ 에 있지 않을까 싶다.


더해서 존 보넘의 드럼 터치는 과하지도, 그리고 덜하지도 않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딱 ‘황금 비율’ 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로버트 플랜트의 보컬과 함께 잘 어우러지며 마치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드럼 파트를 골고루 터치해주는 것이 일품이다. 이 후반부에서는 로버트 플랜트가 기분 내키는대로 가사를 애드리브 하는데, 로버트 플랜트의 말수를 더욱 더 많아지게 만드는 것은 바로 존 보넘의 리드미컬한 드러밍에 있다. Good Times Bad Times는 아주 잘 짜여진 하드 록 트랙과 동시에, 존 보넘의 드럼 연주에 별 다섯개를 주고도 모자르다.

2집 Led Zeppelin II레드 제플린 2집 Led Zeppelin II에는 존 보넘의 공식적 첫 번째 드럼 인스트루먼틀 트랙 Moby Dick이 있어서 더욱 더 의미가 깊다. 첫 번째, 수록곡 Living Loving Maid에서 존 보넘의 드럼 연주가 도드라진다. 전체적으로 스피디한 곡 전개에 날개를 달아주는 식이다. 거기에 지미 페이지의 기타 연주로 하여금 꺾어주는 부분에서는, 힘찬 터치로 흥분을 유도한다. 덧붙여서 중간 반주에서는 지미 페이지의 기타 솔로와 함께 박력있는 드러밍으로 극도의 흥분을 자아낸다. 특히 Living Loving Maid의 2분 5초대에서 터지는 천둥번개 같은 존 보넘의 드러밍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곡을 안 짚고 넘어갈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존 보넘의 첫 번째 드럼 인스트루먼틀. 바로 문학작품 <백경> 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 존 보넘 클래식 Moby Dick이다. 이 곡에서 비로소 존 보넘은 드럼 파트가 더 이상 조연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더해서 Moby Dick은 존 보넘처럼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 위한 모든 드러머들의 꿈이기도 하다. 베이스 드럼부터 시작해서 스네어 드럼까지 오로지 맨 손으로 일관하는 존 보넘의 신기(神技) 에서, 듣는 이의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2분 40초대에서 3분대로 가는 지점은 마치 사람의 심장 박동 같은 느낌이 들 정도. 이런 형태는 진저 베이커가 아프리카 토속 음악을 통해 탐구했던 일명 ‘드럼학(學)’ (?) 을 존 보넘이 물려받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다시 세션과 함께 본 궤도에 오를 때가 일품이다.

3집 Led Zeppelin III블루스 록의 신기원을 세우게 된 레드 제플린 3집 Led Zeppelin III에서는, 첫 번째 노래부터 존 보넘의 드럼 신기를 들을 수 있다. 바로 Immigrant Song인데, 전체적으로 헤비한 세션과 굉장히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는 전개력을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존 보넘의 드러밍은 초지일관 일정한 패턴으로 중심축을 단단하게 잡는다.
우리나라 방송인 황인용이 이 곡에 대해 설명할 때 그렇게 별의별 미사여구를 붙여서 말했던 기억이 있다. 바로 Led Zeppelin III의 얼굴 마담격이자, 레드 제플린표(表) 블루스 록의 넘버원 트랙 Since I've Been Loving You이다. 아마 황인용은 이 곡에서 들려오는 존 보넘의 환상적인 드러밍에 집중해서 그런 미사여구를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문자 그대로 사람의 가슴을 후려치게 만드는 깊이 있는 터치가 예술적이다. 곡 특유의 한(恨)스러움을 존 보넘의 깊이 있는 드러밍으로 잘 표현했으며, 듣는 이에게 시간을 안 주고 점점 전개될수록 쉴 틈이 없이 그 강도가 세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존 보넘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 결국 이 곡에서 로버트 플랜트도, 그리고 지미 페이지도 어찌할 수 없는, 존 보넘만의 잔상이 길게 남는다.



4집 Led Zeppelin IV
Stairway To Heaven이라는 레드 제플린 불후의 마스터피스로 유명한 이 작품에서는 Black Dog의 흥분됨을 또다시 연결시키는 레드 제플린 스타일의 완벽한 로큰롤 Rock And Roll에서 존 보넘의 드럼 연주가 도드라진다. 특히 인트로를 장식하는 존 보넘의 드러밍에 대해서, 평단에서는 “록 역사상 가장 유명한 드러밍 인트로” 라고 극찬한다. 이런 뜻은 대중들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곡에서는 드러머의 조율 능력이 세션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인트로에서부터 시작해서 터지는 존 보넘의 파워 드러밍은 Rock And Roll이 표방하고자 하는 ‘록 예찬가’ 를 살려주는 파트다.
재미있는 곡 전개가 특이한 Misty Mountain Hop에서는 존 보넘의 골고루 뿌려주는 드러밍이 곡의 멜로디를 더욱 더 흥겹게 해준다. 4집의 곡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When The Levee Breaks라는 곡에 대해 알아보며 마치도록 하겠다. 이 곡은 제목 그대로 ‘둑방이 무너지는 상황’ 을 노래로 잘 표현했는데, 존 보넘이 인트로에서부터 시작해서 본 궤도에 오를때까지 들려주는 드러밍은 지미 페이지의 기타 드라이빙보다 더욱 더 그것을 잘 살려준다. 역시 이 곡 또한 다 듣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존 보넘의 드러밍이다. 특히 이 트랙은 세계적인 힙합, 랩 메탈 그룹 비스티 보이즈의 1집 Licensed To ILL에 수록되어있는 노래 Rhymin & Stealin에서 그들이 When The Levee Breaks 드러밍을 샘플링으로 넣은 바 있다.

5집 Houses Of The Holy
얼터너티브적 요소, 그리고 월드 뮤직 및 프로그레시브 록 등 다양한 장르로 실험적인 자세를 취했던 레드 제플린 5집 Houses Of The Holy에서는 그냥 1번 트랙 The Song Remains The Same에서 존 보넘의 예술적인 드러밍이 등장한다. 6분대의 러닝 타임 속에서 The Song Remains The Same이 들려주는 ‘장대한 록 바다’ 에서, 듣는 이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지도해주는듯한, 록 사운드의 가장 표준적인 드러밍을 존 보넘이 들려주고 있다. 한창 불붙은 세션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 익사이팅한 작업을 유지시킬 수 있을지고민한다면, 주저없이 The Song Remains The Same의 그 초지일관 존 보넘의 드러밍에 주목하시라.
동화적인 요소와 아름다운 선율이 돋보이는 The Rain Song에서는 조용하게 터지는 인트로와 초반부를 지나 본격적으로 극적으로 등장하는, 마치 영웅의 개선가에서나 들을 수 있는 ‘영광스럽게 빵빵 터지는 듯한’ 퍼커션 같은 드러밍이 나온다. 이런 역할은 The Rain Song이라는 노래를 더욱 더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월드 뮤직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인 히트곡 D'yer Mak'er에서는 레게 느낌이 충분한, 말 그대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최고의 드러밍을 꼽을 수 있다. 마지막 트랙을 장식하는 The Ocean에서는 전체적으로 들뿐 분위기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깊이 있는 존 보넘의 드러밍을 들을 수 있다.

6집 Physical Graffiti
레드 제플린 최초의 2CD 앨범이자, 발매 직후부터 난리가 난 ‘2CD 앨범의 클래식’ Physical Graffiti에서는 먼저 The Rover라는 곡을 예로 들 수 있다. 잔상이 오래 남는, 아주 인상 깊은 드러밍 인트로가 시작되고, 지미 페이지의 안정된 기타 드라이빙을 따라서 요리조리 피해가는 존 보넘의 난타질은 가히 두 엄지손가락을 들고도 남을 것이다. 더욱 더 그루브감을 더해준다. 로버트 플랜트가 “자동차를 타고 신나게 질주하는 그 기분을 표현했다”라고 말하는 노래 Trampled Under Foot에서는 지미 페이지의 그루브감 충만한 기타 리프와 함께 발맞춰 나아가며, 마치 엔진 소리 팍팍 내며 달려 나가는 잘 빠진 스포츠카를 보는 듯 하다.


후반부 트랙에 완전히 블루스 록으로 칠해버린 Physical Graffiti의 두 번째 CD는, 조용한 노래 빼고는 거의 모두 존 보넘의 환상적인 드러밍에 찬사를 보내고 싶지만, 콕 집어서 하나만 언급하자면 The Wanton Song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로버트 플랜트는 자기 느낌에 충만하여 거의 신기에 가까운 보컬을 내뿜고, 지미 페이지는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기타 리프로 잘라먹는다면, 존 보넘은 그들 뒤에서 곡의 전개(긴박하게 시작 / 헤비한 세션 / 극적으로 돌아들어가는 형태) 를 터주는 역할을 한다. 역시나 드러머의 조율 능력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주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근형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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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백경, 사실적 배경이 있었다.

영어 제목이 '모비 딕'이라는 윗 제목의 소설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많을 것이다.
미국 작가 허만 멜빌이 썼고 영국에서 1851년에 출판되어
지금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작가 허만 멜빌 -그는 주홍글씨를 쓴 나다니엘 호슨과
절친한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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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포경선 페쿠드 호의 에이하브  선장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모비 딕이라는 희고 거대한  고래에게 다리 하나를 잃은 
에이하브 선장은 전 세계 대양을 뒤지며 모비 딕을 찾는다.

결국 모비 딕을 찾아내어 복수의 일전을 벌리지만 그도 죽고
그의
포경선도 모비 딕[백경]의 충격에 침몰한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소설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1951년 명배우
그레고리 펙이 주연하는 영화로도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명연기는 지금도 미국 유 튜브에서 볼 수가 있다.

로마의 휴일에서 귀공자타입으로 나와서 오드리 헵번과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그는 이 영화에서 귀기(鬼氣)가 넘치는
편집광적인 에이하브 선장의 연기를 아주 잘 해내었다

소설을 읽은 사람이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두 가지의
비현실성을
체감 할 것이다.

첫째. 세상에 그렇게 큰 배가 고래에 받혔다고 침몰할 수가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있는가?
둘째. 세상에 그렇게 크고 흰 고래가 있을까?

그래서 이 소설은 그 뒤에 나온 프랑스 쥴 베르느의 해저 이만리와
비슷한 그 시대의 공상 과학 소설류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젊은 시절 1841-1842년 포경선 아퀴시넷 호에서
선원 생활을 했던 바 있었던 허만 멜빌은 자신이 경험을 했던 생활에
황당한 비현실을 끌어 넣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해상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해양 소설을 썼었다.

허만 멜빌은 두 가지의 엄연한 사실을 바탕으로 백경을 썼다.
그 하나는 1820년에 실제로 있었던 미 동부해안 낸턱키트 항 소속의
238톤 크기의 포경선 에섹스 호의 실화다.

에섹스 호 충돌의 순간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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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는 남미 해안에서 2000마일 떨어진 태평양에서
초대형 향유 고래에게 공격 당했다.
에섹스 호는 그 고래의 새끼를 포획 했다가 악에 바친 어미에게
두 번 충격 당하고 침몰하였다.

이빨 고래중 제일 큰 향유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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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 전 스물 한 명의 선원들은 세 척의 구명 보트로 무인도
헨더슨 섬에
기착했으나 섬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

이대로 죽느니 바다로 나가서 지나가는 배에게
구조를 요청해보던가 다른 육지를 발견 해보겠다고
두 척의 구명정을
타고 무인도를 출발했던 18명의 선원들은
동료들이 계속 죽어가고
극도의 아사 상태에 몰리자
제비 뽑기를 해서 동료 선원을
잡아 먹기까지 하며 표류하다가
석 달 뒤에 각기
다른 선박들에 구조 되었지만 중에
결국 다 죽고 다섯 명만이 살아남았다.
구조될 때까지 일곱 명이나 이렇게 동료들에게 잡아먹혔다.

향유고래의 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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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섬에서 다 죽어 가던 세 명의 선원들이 구조 되어서
생존자가 여덟 명이다.

허만 멜빌은 이 배의 일등 항해사 오웬 체이스가 쓴 책을
여러 번 탐독했었다.

다른 하나는 백경을 닮은 하얀 고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래의 흰 색깔은 병적인 알비노 현상으로 생기는 것이다.
향유 고래의 본 색깔은 회색이다.

새끼를 데리고 심해 거대 오징어를 잡는 향유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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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비슷하다.
1830년 칠레 령인 모차 섬 인근에서 포획 되었다 해서
모차 딕이라 불렸다. 

이 하얀 알비노 고래는 1810년에 최초로 발견되었고 그 20년 뒤에
잡힐 때까지 무려 백 여회나 포경선들과 격투를 벌였다.
이 고래는 대단히 사나워서 가끔 포경선을 공격하기도 해댔다.

그가 결국 잡혔을 때 그는 몸에 수십 개작살이 발견되었었다.
뿐만 아니라 대단한 거구였고 몸에 따개비 종의 조개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향유고래는 이빨 고래 중에 제일 큰 종류로서 큰 개체는
20미터가 넘는다.
[에섹스호를 습격했던 고래는 24미터의 초대형으로 추정된다.]
범고래나 상어도 감히 이 향유고래에게는 도전하지 못한다.
몸의 삼분지 일이 머리이고 이 머리는 앞짱구로서 박치기하기
아주 좋게 되어 있다.

박치기 왕 향유 고래의 앞 짱구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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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살아가며 필요하면
3,000미터까지
잠수할 수가 있다.

수명이 70살이 넘고 새끼를 삼년이나 육년마다
한 마리 낳아서 십년간이나 데리고 산다.
그러니 새끼 사랑이 유별 날 수밖에 없다.

이 흰 고래를 잡은 함장의 모습이 허만 멜빌이 묘사한
에이하브 선장과 비슷하다.

멜빌 역시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전신이 하얀 알비노 병을 알던 고래가 포경선에 의해서
포획된 것은 또 있었다.

1859년 스웨덴 포경선이 아주 오래된 흰 고래를
죽인 기록이 있고 훨씬 뒤인 1902년 낸터킷의 포경선이
흰 고래를 잡은 일도 있었다.

고래가 그 무렵 목선(木船)인 포경선을 박치기해서 피해를
준 것은 에섹스 사건뿐이 아니다.
역사의 기록은 고래의 박치기는 여러 번 있었다.

1850년 파커 쿡 호가 대서양의 한 복판에서 고래에게 받혔지만
고래는 선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배의 파손이 심각해서 항구로 귀향하여 독크에 넣고
대수리를 해야 했다.

같은 해에 비슷한 지역에서 포경선 포카혼타스가 고래의 충격에
침몰 당했고 선원들은 구조되었다.
고래가 포경선을 받아서 큰 피해를 준 것은 포경선이 포경 대포를
장비하기 시작한 1850년대에 들어와서 격감했지만 1640년
첫 보고가 된 이래 여러 번 있었다.
포경 작살 대포의 초기형 - 고래에게 치명상을 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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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발견하면 보트를 내려서 작은 작살을 꽂아 죽여야 했으니
고래들도 큰 상처를 입지 않았었고 성질만 자극하여 보트뿐만 아니라
본선도 들이받아 큰 피해를 주었을 법도 하다.

고래의 포경선 충돌 격침은 포경선에 대형 작살을 발사하는
포경 대포가 설치된 1850년대 이후 격감했지만 20세기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지막으로 고래에게 들이 받쳐 침몰된 포경선은 1873년의
와탕카 호가 있다.

영화 모비 딕 - 에이하브 선장[ 그레고리 펙]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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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작살 대포가 생긴데다가 선박들이
철선으로 바뀐 뒤 고래에 박치기 당해 침몰되는 경우는
없어진 것 같지만 지금도 종종 작은 요트나 어선들이
고래에게 받혀서 침몰 당하고 있다.

고래가 받은 것이 아니라 받힌 것이지만 한일간을 왕복하던
쾌속선들이 가끔 고래와 충돌하는 오늘날에는 향유 고래도 인간들에게
극심한 남획을 당하여 수도 멸종 위기 선까지 줄어들었었다.
물론  에섹스 호를  받아서 '격침'시킨 그런 대형 향유 고래는
나타나지 않은지도 백년이 훨씬 넘었다.
7집 Presence
로버트 플랜트가 여러가지 불상사를 겪으며 레드 제플린 팀 내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던 7집 Presence 시기에서, 마치 이런 밴드의 최악의 상황을 음악으로 표현하듯 Achilles Last Stand라는 곡에서 존 보넘의 드럼 연주는 분노 그 자체다. 숨쉴 틈도 없이 진행되는 스피디한 움직임, 그리고 로버트 플랜트가 남은 힘까지 끌어모아 노래를 부르고 지미 페이지의 기타 리프가 한층 더 불붙었을 때, 존 보넘의 드러밍 역시 그들과 함께 최악의 국면을 헤쳐 나가자는 의미로 최대한 파워를 끌어당긴다. 레드 제플린이 그렇게 힘을 잃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Presence라는 앨범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존 보넘이 독기를 품으며 절대 죽지 않은 퍼커션 사운드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8집 In Through The Out Door
존 보넘의 사실상 생전 마지막 앨범이자, 레드 제플린이 최악의 국면에서 벗어나 1980년대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팝 록 및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신식 헤비메탈을 받아들인 그들의 8집 In Through The Out Door. 이제 이 앨범을 끝으로 존 보넘의 신기에 가까운 드러밍은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으며, 존 보넘은 그렇게 1980년 9월 25일, 술을 마시다가 기도에 음식물이 걸려서 호흡 곤란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마침 In Through The Out Door는 전 세계 앨범 차트 1위를 달리는데다가, 미국에서는 그 앨범 수요가 모자라서 다시 찍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각종 악기들이 총동원해서 극도의 신명나는 느낌을 구현하고자 했던 아주 실험적인 하드 록 넘버 Fool In The Rain에서 존 보넘의 드러밍에 칭찬을 줄 수 있다. 그 자체가 신나는 곡인데, 여기에다가 파워풀한 존 보넘의 드러밍이 더해지니 이건 무슨 댄스 록도 아니고, 듣는 이의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우리는 눈으로 그것을 볼 수 없지만, 대충 머릿속에서는 열심히 드럼채를 두들기며 이리저리 드럼의 모든 파트를 터치하는 존 보넘의 바쁜 움직임을 똑바로 상상할 수 있을 정도. 특히 곡이 클라이막스로 다다르는 3분 40초대에 터지는 천둥번개 같은 드러밍은 칭찬을 안 해줄 수가 없다.

마지막 9집 Coda, 그리고 존 보넘의 역작 Bonzo's Montreux
레드 제플린은 우리가 잘 알듯, 존 보넘의 사망 직후 다른 드러머를 불러들이지 않고 그대로 해체했다. 존 보넘이 1980년 사망했는데, 레드 제플린은 이후 더 이상의 세션을 가지지 않고 딱 1980년 공중분해 되었다. 지미 페이지에게 있어서, 존 보넘 사망 직후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해서 계속 활동하라” 고 귀찮은 조언을 수차례 받았다고 했다. 심지어 어떤 언론에서는 유명 슈퍼 밴드의 드러머가 레드 제플린 2기 멤버로 들어올 것이라는 추측성 기사까지 쏟아냈다. 하지만 레드 제플린이 1982년 이례적으로 내놓은 진짜 마지막 앨범 Coda의 노래 Bonzo's Montreux를 들어보면, 왜 레드 제플린이 후임 드러머를 들여오지 않고 그냥 해체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이 곡은 1976년 녹음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레드 제플린 본격 활동 시기에는 정규 앨범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Bonzo's Montreux는 제목 그대로 존 보넘의 드럼 철학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 존 보넘은 결코 드러머가 밴드 내의 조연이 아니라는 것을 활동 내내 피력했으며, 그것은 전 세계 모든 드러머들에게 하나의 존경의 대상이자 ‘나도 할 수 있다’ 라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물을 낳았다. 그럴만도 한 것이, 별다른 보컬이나 기타 없이도 완벽한 록 사운드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Bonzo's Montreux가 들려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파워풀한 드러밍이 일정한 패턴으로 흐르며 안정적 형태를 띤다. 그러나 여기에 지미 페이지의 일렉트릭 샘플링 사운드가 더해지고, 존 보넘의 드러밍이 더욱 더 힘을 싣게 되면 알 수 없는 하드 록의 향연으로 빠지게 마련이다. 주목할 것은, 단지 지미 페이지는 샘플링으로 세션 사운드를 넣었을 뿐, 모든 곡의 전개력은 존 보넘의 드러밍에 있다는 것이다. 존 보넘의 드럼채는 바쁘게 베이스 드럼을 두들기며, 종국에 가서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서 ‘다시는 이 세상에 나올 수 없는’ 고출력의 드럼 사운드와 함께 카타르시스에 도달한다. 완전히 하늘에 닿았을 때, 곡의 끝은 힘없이 축 늘어진다. 마치 존 보넘의 마지막 그때처럼.

헤르만 멜빌의 백경(모비 딕)

뭐 영국식으로 발음하자면 허먼(Herman)이지만

웬지 도이치식으로 발음하는게 좋습니다.=_=


자칫하면 고래잡이 도감으로 보일수 있는 이책은

작가의 엄청난 배경지식으로 씌워졌기때문에 당연한 걸지도 모릅니다.

배위에서 전개되는 스토리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포경에 대한 작가의

고찰이 단락으로 드러나기때문에 몇몇 출판사들은 이 단락들을 짤라내고

순수한 스토리 전개만을 싣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백경의 진수는

역시 멜빌이 직접 경험한 포경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에 대한 고도의 철학적이고

유머러스한 해석 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복합소설이라 불리는데요

그 이유로는 이 소설이 인간의 총체적인 다양한 해석을 담고 있다는게 첫째요

자연주의적 상징주의적 종교적 철학적인 정신분석학적인 형식을 한 소설안에서 다루고있다는게 둘째

입니다.


멜빌의 광기어린 에이허브 선장의 본능적인 어둠의 묘사는 곧 인간에의 조롱 입니다.

증오 광기 악으로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교묘하고 심도있는 스케치를 통해

멜빌은 미국 근대소설의 혁명이 되었습니다.


또한 멜빌은 다양한 형식을 소설안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멜빌이 의도한것인지 아니면 후세의 사람들이 읽고 느낀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자연주의에의 모습은 소설안에 삽입되어있는 포경의 묘사 고래의 생태와 활동

처리 및 가공작업에 대한 묘사는 치밀하고 실제와 100퍼센트 똑같이 묘사되었습니다.

상징주의의 모습의 예를 들어보죠



퀴퀘그는 이스마엘과 처음 만났을때 "이놈 죽인다" 하면서 손도끼를 마구 휘두릅니다.

그러나 몇 페이지 뒤를 넘겨보면 그 손도끼는 우정어린 담배 파이프로 변합니다.

또한 퀴퀘그 자신도 사람을 먹는 식인종이지만 이스마엘에게 사랑과 인내를 가르쳐줍니다.



백경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은 많습니다만 일괄적인 해석은

가능하지 못할뿐더러 시도도 불가능합니다.

멜빌 자신도 백경을 -사악한 소설-이라 칭했죠.


그만큼 고도의 상징과 놀라운 통찰력이 있는 백경은 고전이라 불리기에 마땅합니다.


7분만에 즉흥적으로 날린 감상문이니 조약해도 양해를..

백경과 노인과바다에 대해 비교

백경은 이 과제를 하기 전까지 내가 잘 모르던 소설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백경이 얼마나 위대한 소설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시작부터 ‘내 이름은 이슈마엘이다’라고 시작하며 무뚝뚝하면서도 힘찬 바다 사나이의 문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소설 전개와 직접적 상관이 없는 목수장이, 식인종, 이교도 이야기등 이있고, 고래학, 박물학, 성서학등 지식적인 이야기도 많이 섞여 있습니다.
문체도 독백같은 연극형식, 수필, 장문등이 있고,
시점도 1인칭과 3인칭이 같이 쓰여서 정말 정신없는 작품이라고 단정 짓기 쉽습니다.

백경(白鯨) The white whale : Moby Dick - 허먼 멜빌

 백경  H.멜빌 지음
1851년에 간행된 허만 멜빌의 대표작. 에이허브라는 포경선 선장이 거대한 향유고래인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후 결사적으로 추적하여 태평양 적도 근처에서 사흘간 사투 끝에 패배하여, 포경선과 함께 바다 깊이 잠긴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에서 단 한 사람 살아서 돌아온 청년 이시멜이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600페이지 분량의 촘촘하게 박힌 작은 글씨들을 출퇴근 시간에만 읽기에는 좀 벅찼던거 같다. 대여기간은 2주인데 4주동안 읽었으니, 2주가 연체된 셈이다. 시립도서관이라서 벌금은 없지만 연체일수 만큼 책을 빌릴 수 없다. 사실은 1주일 더 대여기간 연장이 되는데 때를 놓쳐서 신청을 못했다.이건 좀 슬픈 일이구만.. 아무튼 한달 동안 붙잡고 있던 책을 다 읽었으니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상쾌한 기분으로 리뷰를 해볼 까나~...

'스타벅(Starbuck)'에 초점을 맞추다.
친숙한 이름이지 않은지? 맞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이름의 주인이다.커피 체인점 스타벅스(Starbuck)는 바로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스타벅의 이름을 빌려온 것이다. 내가 이 소설을 읽게된 계기도 알고 보면 스타벅스 때문일 것이다. 어릴적 얇은 그림책으로 읽은 기억이 있어 어렴풋이 책의 내용에 대한 이미지 같은 것만 살짝 남아 있었을 뿐 이었기 때문에 스타벅이라는 인물이 나왔었는지 어쨌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 한번 읽어 보자.. 라는 맘으로 ..

거대한 스케일의 소설..
이책을 막 읽기 시작했을때 난 알수 없는 난해함에 계속 부딪치고 있었다. 심오한 내용에 대한 이해력 부족을 호소 하며 읽고 있노라면, 소설 전개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목수장이 이야기나,식인종, 이교도,.. 등등.. 고래학, 박물학,성서의 내용등 여러 장(章) 들이 나타나 내 정신을 흐려 놓는가 하면, 독백이나 연극 형식의 장이 새롭게 등장해 나를 낯설게 만들어 버린다.다행히 책의 중반을 넘어가면서 부터는 적응이 되고 작가의 정중한 문체와 역사와 종교 문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 그리고 작가의 통찰력에 빠져들게 된다.

에이허브 선장과 스타벅 일등항해사..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후 에이허브 선장은 복수귀(復讐鬼)가 되어 모비딕을 쫓아 피쿼드 호를 타고 대서양,태평양,인도양으로 추적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고래로 부터 채취한 기름창고를 수리 하기 위해 활차를 감아야 한다고 스타벅은 에이허브에게 건의 하지만 에이허브는 오직 모비딕을 쫓는 일에만 집중 하라며 스타벅에게 총을 겨누고 위협을 한다. 둘사이에는 흥분과 긴장감이 맴돈다.

"악마! 그럼 자네는 감히 나를 비난할 생각을 갖고 있단 말이지, 나가라!"
"아니오, 선장, 잠깐만 기다리십시오.부탁입니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서, 선장,참기로 합니다. 에이허브 선장, 우리는 여태까지보다도 좀더 서로를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중략..)에이허브는 총알을 잰 머스킷 총을 꺼내서 스타벅을 향해 겨누면서 외쳤다.

"단 한 분의 신만이 지상을 주재하신다. 단 한 사람의 선장이 피쿼드를 주재한다. 갑판으로 나가!"

순간 항해사의 눈은 번쩍 섬광을 발하고, 뺨은 불처럼 타올랐다. 그것을 본 사람은 정말로 그가 겨누어진 총구로부터 불꽃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는 격정을 누르고 조용히 일어서서 방을 나서려고 하다가 순간적으로 멈추고는 말했다.

"선장, 당신은 나에게 화를 냈지만 나를 모욕한 것은 아니오. 그러니 이런 일로 스타벅을 경계할 필요는 없소.그저 웃고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에이허브씨는 에이허브씨를 경계하시오. 영감, 자기 자신을 두려워 하시오."
"용감하군 그래, 그래도 복종했어. 흥, 몹시 신중한 용감이야!"

스타벅의 침착하고 냉정한 성격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복수귀 에이허브로부터 선원들과 배를 보호하려는 스타벅의 이미지는 어머니의 그것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스타벅은 살인자가 되더라도 에이허브를 해치우고 모두를 낸터킷으로 무사히 귀항시킬 수 있는 기회 앞에서 깊은 고뇌와 갈등으로 방황 한다.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너무도 감동적이다. 그 때의 에이허브는 무방비 상태로 해먹에 잠들어 있고, 스타벅스의 손에는 머스킷 총이 들려있었다.

막바지에 이르러 이러한 둘사이의 긴장감은 모비딕을 추적하기 시작한 사흘동안 서로에 대한 연민으로 바뀌어 간다. 항해의 목적을 앞에둔 에이허브 선장은 스타벅의 눈동자로 부터 지나간 세월을 보고 스타벅은 닥쳐올 재난을 느끼면서 에이허브를 걱정 하며 그를 백경으로 부터 돌이키려고 하는데.. 가히 악마적인 에이허브의 집념을 스타벅은 결국 막지 못한다.

지구의 주인과의 싸움은 끝나다
지구는 2/3가 바다이고, 바다의 주인은 고래이다. 추적 3일째 되는 날 싸움은 끝났다. 에이허브와 모비딕의 싸움은 '이스마일'을 제외한 피쿼드 호의 모든 선원이 파도의 수의를 덮고 바다에 잠들면서 끝나게 된다. 백경-모비딕- 은 어떻게 보면 대자연을 상징하는 것같다. 끝없이 펼쳐지는 밝고 푸른 여성적인 하늘과 무겁고 짙은 남성의 바다, 그리고 바다를 지배하는 고래..

ps : 책을 다 읽고 나니 뿌듯한 성취감과 감동이 밀려 왔다. 고전 명작은 왜 이렇게 인내심을 하염없이 요구 하는지.. 그래서 일까? 읽고 나서의 즐거움은 배로 늘어 나는 것 같다. (커피애호가라는 스타벅스의 설명과는 전혀 맞지 않게 커피얘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